[뮤지컬] "잔혹동화 생존기" (호러보이드, 고전소설, 다크판타지)

뮤지컬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동화'보다 '생존기'라는 단어가 먼저 눈에 꽂혔습니다. 동화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니, 이건 그냥 귀여운 판타지가 아니겠다 싶었습니다. 뮤지컬 《잔혹동화 생존기》는 한국 고전소설과 서양 동화를 뒤섞어 버려진 이야기들의 세계를 무대 위에 올린 창작 뮤지컬로, 2026년 9월 8일부터 11월 29일까지 대학로 TOM 1관에서 초연됩니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 그림
[ 잠자는 숨속의 공주 ]

[뮤지컬 잔혹동화 생존기 공연정보 안내]

공연일 2026년 9월 8일 ~ 11월 29일
공연장 서울 대학로 TOM(티오엠) 1관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8가길 49)
예매처 티켓링크, 예스24티켓
티켓 가격 R석 70,000원 / S석 50,000원
공연 시간 약 100분
관람 연령 만 16세 이상


버려진 이야기들이 모이는 세계, 호러보이드

이 작품의 세계관(World-building)이 독특합니다. 세계관이란 극 중 인물들이 살아가는 환경과 규칙의 총체를 말하는데, 《잔혹동화 생존기》는 '호러보이드'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설정했습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진 이야기들이 쌓이는 일종의 쓰레기 차원입니다. 이야기 관리자들이 우주가 넘치지 않도록 필요 없다고 판단한 이야기들을 골라 버리면, 그 속의 등장인물들이 이곳에 떨어져 서로를 먹으며 버텨야 합니다.

솔직히 이 설정을 처음 읽었을 때 예상 밖이었습니다. 보통 동화를 비튼 작품이라고 하면 악당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다시 쓰는 방식을 많이 씁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아예 동화 바깥의 공간을 만들어버렸습니다. 어떤 이야기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떠도는 인물들이 모이는 장소, 그리고 거기서도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 그 설정만으로도 이미 뮤지컬 한 편 분량의 이야기가 생겨납니다.

배경이 되는 세 인물은 각각 한국 고전소설에서 왔습니다. 《배비장전》의 기생 애랑, 《변강쇠전》의 등장인 옹녀, 그리고 《은애전》의 은애입니다. 세 인물은 원작의 인물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작품의 새로운 세계관인 '호러보이드' 안에서 재해석됩니다. 이들이 전설의 책 '동화의 정석'을 발견하면서 이야기가 출발합니다. 책 속에는 "완벽한 왕자의 키스를 받으면 동화나라로 가는 문이 열린다"는 구절이 담겨 있고, 세 사람은 그 방법을 따르기로 합니다.

이 세계관의 핵심은 단순히 무섭다거나 어둡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제가 흥미롭게 본 부분은 '버려진다'는 설정 자체가 가진 무게감입니다. 기억에서 사라진다는 것, 이야기에서 지워진다는 것이 인물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무대가 어떻게 풀어낼지 궁금해집니다.


고전소설 세 인물이 한 무대에 서는 이유

이 작품에서 제가 특히 주목한 것은 세 인물의 출신 원작들입니다. 《배비장전》, 《변강쇠전》, 《은애전》은 모두 조선시대 고전소설인데, 셋 다 사회 규범 밖에 놓인 인물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기생, 과부, 살인의 죄를 진 여인. 당시 기준으로 보면 정통 서사의 중심에 설 수 없었던 인물들입니다.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 즉 이야기가 전개되는 뼈대 측면에서 보면 이 세 인물을 호러보이드에 모아놓은 선택은 꽤 영리합니다. 원래부터 이야기의 가장자리에 있던 인물들이 이번에는 무대의 한가운데로 나온 것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주제가 됩니다. 한국 고전소설 연구 자료에 따르면 《배비장전》의 애랑은 양반을 골탕 먹이는 능동적 인물로, 《변강쇠전》의 옹녀는 당대 관습을 거스르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두 작품 모두 조선 후기 해학 소설의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뮤지컬 속 세 인물의 캐릭터 설정도 눈에 들어옵니다.

  1. 애랑: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계략적 기생. 신의정·주다온·선유하가 번갈아 연기합니다.
  2. 옹녀: 사랑하는 사람이 반복해서 죽는 상황에서도 사랑을 놓지 않는 인물. 김초하·곽나윤·표바하가 맡습니다.
  3. 은애: 자신이 저지른 살인의 흔적을 치마에 새긴 채 살아가지만, 때로는 분노를 참지 못하는 양면적 존재. 한보라·신진경·류비가 나눠 맡습니다.

세 명 모두 무언가를 짊어진 인물들입니다. 완벽하게 선하지도, 완전히 악하지도 않습니다. 그 불완전함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접 겪어보지 않아도 이런 캐릭터들은 무대에서 훨씬 입체적으로 살아납니다. 반듯한 주인공보다 상처를 가진 인물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왕자의 키스가 구원인가, 조건인가

작품의 핵심 장치는 '프린스 차밍'의 키스입니다. 그림 형제 동화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서 공주를 깨우는 왕자처럼, 이 작품에서도 왕자의 키스는 호러보이드를 탈출하는 열쇠입니다. 그런데 그 설정을 들여다보면 좀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알레고리(Allegory)라는 표현 방식이 있습니다. 이야기 속 사물이나 사건을 통해 다른 의미를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기법인데, 이 작품의 '왕자의 키스'가 딱 그런 장치로 읽힙니다. 표면적으로는 동화의 공식을 따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누군가에게 선택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놓은 겁니다.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왕자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구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습니까.

제가 이 부분에서 멈칫했던 이유는 그게 너무 현실적으로 느껴져서입니다.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좋은 조건을 갖추면 삶이 나아질 거라는 믿음. 그 믿음을 향해 달리는 동안 나는 정말 내가 원하는 걸 좇고 있는 건지, 아니면 누군가가 만들어둔 정답을 외우고 있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세 인물이 프린스 차밍을 찾아 키스를 받으려 한다는 설정을 생각해 보니 그 질문이 자연스럽게 겹쳐졌습니다. 호러보이드를 벗어나는 것이 목표이지만,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다른 사람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면 과연 그것을 온전한 구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실제로 2026년 7월 24일 뉴데일리 기사에서 박예림 작·연출은 이 작품을 ‘불완전한 이들의 연대와 생존’을 다룬 이야기라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흔들리고 실패하더라도 매일 자신만의 서사를 새롭게 써 내려가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응원이 되기를 바란다는 취지의 이야기도 전했습니다(출처: 뉴데일리) 이 이야기를 접하고 나니 왕자의 키스가 단순히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키스를 받는 순간이 아니라, 그곳에 도착하기까지 세 인물이 어떤 선택을 하고 서로 어떻게 버티는가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왕자의 키스’보다 그 키스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이 오히려 이 작품에서 더 궁금한 부분으로 남았습니다.


다크 판타지가 대학로에서 풀어내야 할 숙제

뮤지컬 《잔혹동화 생존기》는 장르 측면에서  다크 판타지(Dark Fantasy)로 분류됩니다. 다크 판타지란 판타지 장르에 공포, 비극, 도덕적 모호함 같은 어두운 요소를 결합한 방식을 뜻합니다. 그런데 작품 소개를 보면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에 마법소녀 판타지와 유머를 더했다고 합니다. 이 조합이 성립하려면 연출의 균형 감각이 중요합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라는 용어는 무대나 화면 위의 모든 시각 요소, 즉 조명, 무대 장치, 배우의 위치와 움직임을 포함한 전체 시각적 구성을 의미합니다. 100분 공연 안에서 호러보이드의 그로테스크함과 동화나라의 판타지적 감수성을 동시에 담아내려면 이 미장센 설계가 핵심입니다. 무대디자이너 이은경, 조명디자이너 이주원, 의상디자이너 도연이 어떤 시각 언어를 선택했는지가 관람 경험을 크게 좌우할 것입니다.

음악은 맹재준 작곡가와 민활란 음악감독이 맡았습니다. 특히 판타지와 해학이라는 서로 다른 색깔을 음악 안에서 어떻게 풀어낼지가 궁금합니다. 그림 형제 동화에서 느껴지는 서정적인 분위기와 한국 고전소설 특유의 익살스러운 느낌이 넘버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만날지도 이 작품을 볼 때 살펴보고 싶은 부분입니다.


공연을 아직 보지 못한 시점에서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설정을 읽는 것만으로도 생각이 꽤 많아졌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왕자의 키스를 목표로 삼는다는 이야기가 처음엔 단순해 보였는데, 들여다볼수록 지금 제가 사는 방식과 겹치는 장면들이 보였습니다. 9월 개막 이후 직접 관람한 뒤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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