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 "시간을 파는 상점" : 크로노스, 온조, 시간의 가치

 연극 《시간을 파는 상점》 보기 전까지 '시간을 판다'는 말이 단순한 말장난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그 말이 꽤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무대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단순한 재미를 넘어, 평소 당연하게 생각했던 ‘시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했습니다.이 글은  '내가 시간을 살 수 있다면 어떤 시간을 사고 싶을까'라는 질문이 계속 맴돌았던 경험에서 시작합니다.


모래시계



     연극 [시간을 파는 상점] 공연정보


크로노스라는 이름, 그리고 온조의 선택

연극 《시간을 파는 상점》주인공 온조는 인터넷 카페에 '시간을 파는 상점'을 열고 닉네임 '크로노스(Chronos)'를 사용합니다. 크로노스란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시간을 관장하는 존재로, 물리적 시간의 흐름 그 자체를 상징합니다. 단순히 멋진 닉네임을 고른 게 아니라, 온조가 자신의 역할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출처:테오이그리스 신화)

온조가 이 상점을 연 배경에는 소방대원이었던 아버지가 있습니다.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다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으려는 마음이 온조의 행동 밑에 깔려 있습니다. 저는 이 설정이 단순한 감동 장치라기보다, 왜 온조가 돈을 받고도 사적인 이익이 아닌 타인의 필요를 채우는 방식으로 시간을 사용하는지를 설명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원작은 김선영 작가의 동명 청소년소설로, 제1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연극은 이 소설을 바탕으로 각색되었으며, 원작 소설이 가진 성장 서사(成長 敍事), 즉 주인공이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가치관을 만들어가는 이야기 구조를 무대 위에서 그대로 살려냈습니다. 성장 서사란 단순히 나이가 드는 이야기가 아니라, 선택과 그 결과를 통해 내면이 변하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를 뜻합니다.(출처: 자음과 모음공식-청소년문학상 역대 수상자)

제가 처음에 '말장난'이라고 느꼈던 '시간을 판다'는 설정이, 온조의 배경을 알고 나서는 다르게 보였습니다. 온조는 자신이 가진 시간을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씁니다. 이건 어떻게 보면 아버지가 자신의 생명을 걸고 타인을 도왔던 것과 다르지 않은 구조입니다. 규모는 달라도 방향은 같습니다.

이 작품이 단순한 심부름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의뢰의 종류를 보면 더 명확해집니다.

  1. 훔친 물건을 원래 자리에 돌려달라는 의뢰 —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양심의 문제
  2. 할아버지와 함께 맛있는 식사를 하는 시간 — 함께하는 경험 자체가 목적
  3. 천국에 있는 유치원 선생님께 편지를 전달하는 일 —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연결의 욕구

세 가지 의뢰 모두 공통점이 있습니다. 돈을 준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시간을 내어 움직여야 비로소 가능한 일들입니다. 이 구조 자체가 이 작품이 말하려는 것을 꽤 직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온조의 시간, 그리고 우리가 지나치는 시간의 가치

저는 공연을 보고 나서 '시간을 살 수 있다면 무엇을 사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꽤 오래 붙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중학교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생각할수록 그게 아니었습니다. 과거보다 오히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시간을 사고 싶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10년 후의 제 모습을 잠깐 볼 수 있다면, 지금 제가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조금 더 분명해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은 과거의 시간을 사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 시간이 반드시 과거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미래의 시간을 산다는 건, 지금 현재를 수정·보완하기 위한 준비 시간을 얻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 공연에서 온조가 파는 시간의 단위는 거창하지 않습니다. 하루나 일주일이 아니라, 짧은 순간들입니다. 그 짧은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전부가 됩니다. 이 설정이 저에게 가장 오래 남은 이유는,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많은 짧은 순간들을 별것 아닌 것처럼 흘려보내는지 생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기회비용이란 어떤 선택을 했을 때 포기해야 하는 다른 선택의 가치를 뜻합니다. 경제학 교과서에서 나오는 말이지만, 이 공연을 보고 나서는 이 개념이 숫자나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한 친구와 보내는 두 시간과, 생산성 없이 휴대폰을 보며 흘려보내는 두 시간은 길이가 같아도 나중에 남는 무게가 전혀 다릅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보니, 이건 이론이 아니라 꽤 실질적인 차이였습니다.

연극은 이 지점을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냥 보여줍니다. 관객은 온조가 움직이는 모습을 따라가다가 자연스럽게 '나는 내 시간을 어디에 쓰고 있지?'라는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됩니다. 참여형 공연의 구조가 이 과정을 더 직접적으로 만들어주고, 그래서 80분이 생각보다 훨씬 빨리 지나갑니다.

공연의 참여형 구조(interactive performance)란 관객이 단순히 앉아서 보는 것이 아니라 공연 진행에 직접 반응하거나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뜻합니다. 이 작품은 아이들이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끼어들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어서, 부모 입장에서도 단순히 아이를 데려오는 것 이상의 경험이 될것 같습니다.


시간의 가치를 다시 보게 만드는 이유

인터파크 관람평 9.7점, 누적 관객 45만 명이라는 수치는 분명 의미 있는 숫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숫자보다 더 주목하게 된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 공연이 2015년부터 지금까지 오픈런(open run) 형태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픈런이란 종료일을 정하지 않고 관객이 있는 한 계속 공연을 이어가는 방식을 뜻합니다. 한 편의 연극이 10년 가까이 같은 극장에서 계속 공연된다는 건, 한 번 보고 끝나는 소비형 콘텐츠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공연이 대학로 NO.1 청소년·가족 연극으로 자리를 잡은 배경에는 세대를 넘나드는 질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라는 주제는 여덟 살도, 마흔 살도,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이에게는 '내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질문이 성장의 시작이 될 수 있고, 어른에게는 '나는 정말 중요한 것에 시간을 쓰고 있는가'라는 자기 점검이 됩니다.

카이로스(Kairos)라는 개념도 이 작품과 함께 생각해볼 만합니다. 카이로스란 양적으로 흐르는 시간이 아닌, 질적으로 의미 있는 순간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입니다. 크로노스가 시계로 잴 수 있는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그 안에서 특별하게 살아있는 순간입니다. 온조가 파는 시간은 크로노스의 단위지만, 그 시간이 만들어내는 것은 카이로스에 가깝습니다. 이 작품의 가장 핵심적인 역설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시간이 생기면 가족과 함께 보러 가겠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 생각이 조금 아이러니하다고 봅니다. '시간이 생기면'이라는 조건이 붙는 순간, 이미 그 시간은 우선순위에서 밀린 것입니다. 이 공연이 던지는 질문이 정확히 그 지점을 건드립니다. 나중으로 미루는 사이에 사라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결국 이 공연이 10년 가까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이유는, 화려한 무대장치나 스타 캐스팅이 아니라 질문 하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내가 가진 시간 중 이미 소중한데 너무 당연하게 흘려보내고 있는 시간이 있지 않을까?' 이 질문을 가지고 공연장에 들어가면, 80분이 끝난 뒤에도 그 질문은 계속 남습니다. 가족과 함께 볼 기회가 생긴다면, 너무 오래 미루지 않기를 권합니다. 미루는 것 자체가 이미 이 공연과 어울리지 않는 태도일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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