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알앤제이" ] 우리는 왜 금지된 이야기에 더 끌리는 걸까 (소품,서사,FAQ,결론)
뮤지컬을 처음 보는 사람한테 《알 앤 제이》를 추천하면 열에 아홉은 공연이 끝나고 이런 말을 합니다. "그래서 결말이 뭘 말하고 싶은 거였지?" 저도 딱 그랬습니다. 처음 봤을 때는 붉은 천만 기억에 남고, 뭔가 뜨거웠는데 정확히 무엇이 뜨거웠는지 말을 못 했습니다. 그래서 두 번 봤고, 그 다음에야 비로소 이 극이 얼마나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는지 알게 됐습니다.
연극《알앤제이(R&J)》공연일정
- 공연 기간 : 2026년 9월 5일 ~ 9월 26일
- 공연 일정 : 9월 5일·12일·19일·26일, 매주 토요일
- 공연 시간 : 오후 7시
- 공연장 : 이함캠퍼스 연회동 (경기도 양평군 강남로 370-10)
- 티켓 가격 : 현재 티켓은 *매진된 상태*로, 예매 페이지에서 판매 가격을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추가 좌석이나 취소표가 나올 수 있으므로 관람을 원하는 경우 예매처를 다시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소품 하나로 세계를 만드는 법 — 붉은 천과 젠더프리 연출
《알 앤 제이》에 대해 "소품이 거의 없는 공연"이라는 선입견이 있곤 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제 경험상 이 평가는 딱 절반만 맞습니다. 무대에 소품이 아예 없는 게 아니라, 단 하나의 독보적인 소품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에는 바로 붉은 천이 있습니다.
이 붉은 천은 극이 전개되는 동안 때로는 아슬아슬한 발코니가 되고, 애절한 침실이 되며, 서늘한 수의나 금단의 책을 감싸는 비밀스러운 포장지로 변모합니다. 두 사람이 이 천을 함께 뒤집어쓰는 순간 그곳은 오롯이 두 사람만의 아늑한 작은 방이 되며, 그것은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의 풋풋한 첫날밤을 연상시키는가 하면, 어른들의 시선을 피해 숨어드는 소년들의 은밀한 비밀 기지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천이 무엇을 상징하고 어떻게 해석될지는 온전히 관객 저마다의 몫입니다. 솔직히 저 역시 두 번째 관람에 이르러서야 이 천이 품고 있는 상징적 역할을 온전히 따라갈 수 있었고, 그 순간 비로소 이 극이 지닌 진짜 매력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젠더프리(gender-free) 연출이라는 개념을 꼭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젠더프리란 배역의 성별을 배우의 실제 성별과 일치시키지 않고 유연하게 캐스팅하는 방식을 뜻하는데, 《알 앤 제이》에서는 전 출연진이 남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설정이 가능한 이유는 원작 『로미오와 줄리엣』이 극 속에 또 다른 극이 존재하는 액자식 구성(frame narrative)으로 각색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무대 위 소년들이 엄숙한 학교 안에서 연극을 통해 줄리엣을 '연기'하는 구조일 뿐, 남성 배우가 여성 캐릭터 그 자체를 고스란히 흉내 내는 것과는 결이 전혀 다릅니다.
그렇다 보니 공연 초반, 학생2가 줄리엣 역을 맡아 무대에 오르는 순간 관객은 꽤 큰 당혹감을 느끼게 됩니다. 남학생인 배우가 조금도 '여성스러운' 제스처를 취하지 않고, 학생3과 학생4 역시 연기 도중 불쑥 평소의 일상 톤으로 되돌아갔다가 다시 극 속으로 빠져드는 흐름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극을 곱씹어 볼수록 이 낯선 호흡은 단순한 어색함이 아니라, 연극과 현실의 경계를 일부러 느슨하게 흔들어 무너뜨리려는 매우 치밀한 연출적 장치임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1997년 미국 뉴욕 초연 이후 전역에서 400회 이상 무대에 오르며 수많은 마니아를 양산한 작품이 굳이 이 복잡한 구조를 고집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출처: 쇼노트 공식 사이트).
무대 위에는 단상과 의자, 그리고 전등 몇 개가 전부입니다. 그 허전한 공간을 채우는 건 이해랑 예술극장 특유의 진한 나무 향과 배우들의 격렬한 발구름 소리입니다. 덕분에 팬들 사이에서는 '알앤제이해랑'이라는 말이 따로 생겨났을 만큼, 이 극장과 공연은 뗄래야 뗄 수 없는 한 몸처럼 여겨집니다. 직접 객석에 앉아보면 배우들이 바닥을 쿵쿵 구르며 내는 소리가 의자 등받이 너머로 고스란히 진해져 옵니다. 이런 생생한 현장감은 다른 극장에서는 쉽게 느껴보기 힘든 매력입니다.
- 붉은 천: 극 전체에서 발코니, 침실, 수의, 금단의 책 포장 등 다양한 상징으로 활용
- 젠더프리 캐스팅: 모든 역할을 남성 배우가 맡되, 액자식 구성 안에서 자연스럽게 처리
- 이해랑 예술극장: 2018년 초연부터 사연까지 같은 공간에서만 공연, 나무 냄새·발구름 진동이 공연의 일부
- 단조로운 소품: 관객이 직접 상상으로 채우도록 설계된 의도적 여백
대사 하나가 전부를 바꾼다 — 소네트 18번과 학생들의 서사
연극 《알 앤 제이》를 처음 관람하는 분들은 액자식 구성의 바깥 이야기, 즉 네 명의 학생이 만들어내는 서사가 다소 불분명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비슷하게 생각했습니다. "결국 학생들이 금서를 읽으며 연극을 하다가 아침을 맞이한 내용이 아닌가?"라는 감상을 안고 극장 문을 나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연극의 구조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연극 《알 앤 제이》 극 중에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18번(Sonnet 18)〉이 등장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소네트란 14행으로 구성된 정형시 형식으로, 셰익스피어가 남긴 154편의 소네트 중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손꼽힙니다. "그대를 여름날에 비교해도 될까요? 당신은 그 어떤 여름날보다 사랑스럽습니다"로 시작하는 이 구절은 원문의 정서와 뉘앙스를 한국어로 잘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학생 3과 학생 4가 대본을 찢으며 훼방을 놓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학생 1과 학생 2가 이 소네트를 읊으며 결혼식 장면을 이어가는 모습은 기대 이상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필사적으로 극에 몰입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물론,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학생들의 진솔한 모습이 함께 겹쳐 보였습니다.(출처: Shakespeare's Sonnets).
일반적으로 연극 《알 앤 제이》는 "원작 『로미오와 줄리엣』을 잘 아는 관객이 더 깊이 즐길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원작의 줄거리를 알고 있다면 극 중 극의 전개를 따라가는 데 훨씬 수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짜 핵심은 원작의 서사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연기하는 네 명의 학생들이 어떻게 변화하고 성장해 가는가에 있습니다.
엄격한 규율이 지배하는 가톨릭 남학교라는 배경 설정은 억압과 금기라는 주제를 직접적으로 구현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억압(repression)이란 단순한 체벌이나 규칙을 넘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욕망하는 행위 자체가 죄가 되는 구조를 의미합니다.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마라"라는 대사가 작품 전체를 관통하지만, 실제로 이 극은 그 욕망을 솔직하게 따라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학생들이 교복을 벗어 던지는 연출은 바로 그 억압의 틀에 완벽한 균열이 열리는 지점이며, 제가 이 장면에서 강렬한 전율을 느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공연의 공식 러닝타임은 150분이지만, 배우들의 체력 소모는 극심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무대와 객석을 쉴 새 없이 뛰어다니는 격렬한 동선 탓에, 시즌 마지막 공연 즈음이 되면 배우들의 체중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는 후기가 관객들 사이에서 꾸준히 언급됩니다. 실제로 제가 네 번째 시즌의 마지막 공연을 직접 관람했을 때, 배우의 얼굴이 초연 당시 사진과 비교해 확연히 수척해 보였던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 알 앤 제이, 뮤지컬 초보자가 봐도 괜찮나요?
A. 입문자에게 선뜻 권하기는 다소 조심스럽습니다. 액자식 구조 특성상 초반 흐름을 따라가기 어렵고 결말도 추상적이어서, 줄거리를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 나오는 관객이 많습니다. 다만 원작 『로미오와 줄리엣』 내용을 미리 파악하고 관람하시면 작품 몰입도가 훨씬 높아집니다.
Q. 젠더프리 뮤지컬이라고 하는데, 남자 배우가 여자 역할을 연기하는 게 어색하지 않나요?
A. 처음엔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는 의도된 연출 장치입니다. 학생 2가 줄리엣을 전형적인 여성성에 맞추어 연기하지 않으면서, 이 작품이 '연기하는 학생들의 서사'라는 점이 더 명확해집니다. 처음의 당혹감이 결국 극의 핵심적인 매력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결론
연극 《알 앤 제이》에는 화려한 무대 세트도, 많은 수의 앙상블 배우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직 붉은 천 한 장과 네 명의 배우, 그리고 이해랑 예술극장 바닥을 진동시키는 발구름 소리가 무대의 전부입니다. 첫 관람 당시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작품일까?" 하는 의구심을 안고 나왔다가, 두 번째 관람에서 작품의 깊이에 완전히 사로잡혔던 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 극은 단 한 번의 관람만으로 끝내기엔 너무나 아까운 명작입니다.
정형화된 틀과 억압에 맞서 싸우는 주제가 다소 추상적으로 느껴진다면, 『로미오와 줄리엣』 원작을 사전에 미리 파악하고 관람하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무대 위 배우들이 어느 순간에 '학생'으로 돌아오고, 어느 순간에 '로미오'에 몰입하는지 그 변화를 추적하며 감상하는 것이 핵심 관전 포인트입니다.
참고: https://namu.wiki/w/%EC%95%8C%20%EC%95%A4%20%EC%A0%9C%EC%9D%B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