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 "늘근도둑이야기": 애드리브, 시사코미디, 배우선택
1989년 초연 이후 지금까지 대학로를 지켜온 《늘근도둑이야기》. 공연 정보를 찾아보다가 예매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한참을 멈칫했습니다. 박철민과 유일한 배우가 제가 원하는 회차에 함께 출연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작품인 만큼 공연 자체도 궁금했지만, 이번에는 작품보다 어느 배우의 조합을 볼지 더 오래 고민하게 됐습니다.
애드리브가 많다는데, 직접 앉아봐야 아는 것들
주변에서 이 공연 얘기가 나올 때마다 꼭 따라붙는 말이 있었습니다. "애드리브가 진짜 많아." 그 말을 서너 번쯤 들으면서도 그냥 흘려들었는데, 막상 공연 정보를 찾아보니 이게 단순한 칭찬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드리브(ad-lib)란 대본에 없는 즉흥 대사나 행동을 뜻합니다. 배우가 그 순간의 분위기와 관객 반응을 읽어 순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으로, 연극에서는 배우의 내공을 가장 날것으로 보여주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특히 코미디 장르에서는 이 즉흥성이 공연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변수가 되기도 합니다.
저는 코미디 공연을 볼 때 미리 너무 많은 정보를 챙겨보지 않으려는 편입니다. 어느 장면에서 웃음이 터지는지 알고 들어가면, 그 웃음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경험을 몇 번 해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줄거리를 자세히 파고들기보다 배우가 만들어내는 공기를 그냥 받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늘근도둑이야기》가 주목받는 이유 중 하나는 매 시즌마다 당대의 시사 이슈를 반영해 대사를 바꾼다는 점입니다. 같은 작품을 2년 전에 본 관객과 올해 본 관객이 서로 다른 웃음을 경험하게 되는 구조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공연에서 애드리브는 단순한 재미 요소가 아니라, 작품이 지금 이 시대와 호흡하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관람평 중에는 "애드리브가 너무 많아서 오히려 산만하다"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의견을 읽으면서 공감도 됐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코미디 연극에 문학적 완성도를 기대하는 것과 그 공연이 의도한 방향성 사이에는 분명 거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연극이 같은 자리에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사코미디라는 장르, 이 작품이 37년을 버틴 이유
시사코미디(時事comedy)란 그 시대의 사회 현상이나 정치적 상황을 웃음의 소재로 삼는 코미디 장르를 뜻합니다. 단순히 웃기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웃음을 통해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 핵심입니다. 《늘근도둑이야기》는 1989년 초연 당시 파격적인 정치 풍자로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고, 그 방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작품의 설정이 흥미롭습니다. 대통령 취임 특사로 풀려난 두 늙은 도둑이 부잣집의 금고를 털려다가 '그 분'의 미술관에 들어가게 됩니다. 미술관 안에 세계적인 현대미술 작품이 즐비하지만, 두 도둑은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설정 자체가 이미 이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입니다.
풍자(諷刺, satire)란 대상의 모순이나 문제점을 과장과 해학을 이용해 드러내는 표현 방식입니다. 어렵게 비판하는 것보다 웃음 속에서 더 깊이 찌르는 방식이 풍자의 강점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이 오랜 시간 대학로에서 살아남은 데에는 바로 이 풍자의 방식이 결정적이었을 것입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실제로 2003년 명계남, 박철민, 최덕문이 출연한 시즌에는 비가 오는 날에도 대기표를 받기 위해 줄을 서야 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단순히 배우 개인의 인기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수치입니다. 이 공연의 어떤 부분이 그 많은 관객을 움직였는지, 저도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졌습니다.
현재 이 작품은 대학로 아트포레스트 1관에서 공연 중이며, 2026년까지 일정이 잡혀 있습니다. 공연 시간은 100분, 12세 이상 관람이 가능합니다. 인터파크 예매자 평점 9.5점이라는 수치는 단순 인기가 아니라 관람 후 실제 만족도를 반영한 것입니다. 한두 달 반짝하고 사라지는 공연과는 분명 결이 다릅니다.
《늘근도둑이야기》가 전국 60개 도시를 돌며 흥행 기록을 쌓은 것도 이 맥락에서 읽힙니다. 대학로의 콘텐츠가 서울을 벗어나 지방 관객에게까지 먹혀들었다는 건, 이 작품이 특정 지역의 정서가 아니라 보편적인 사회적 감각을 건드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박철민이냐 유일한이냐, 배우 선택이 이렇게 어려울 줄은
솔직히 이 고민이 생길 줄은 몰랐습니다. 공연을 하나 보러 가면서 예매 화면에서 이렇게 오래 머무른 적이 없었습니다. 두 배우가 같은 회차에 출연하는 일정이 없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예매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가 되어버렸습니다.
박철민 배우는 방송에서 워낙 자주 봐온 얼굴이라 이름만 들어도 자연스럽게 기대가 올라옵니다. TV에서 익숙하게 보던 배우 무대에서 직접 만났을 때 어떤 느낌인지, 그 차이가 궁금하기도 합니다. 영상 매체와 무대 공연 사이에는 분명한 온도 차이가 있고, 그 차이를 직접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반면 유일한 배우는 예전부터 한 번 무대에서 만나보고 싶었던 배우입니다. 이쪽도 쉽게 포기하기 어렵습니다. 같은 작품인데 배우에 따라 공연의 분위기와 웃음의 결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이 작품이라면 그 차이가 더 선명하게 드러날 것 같습니다.
캐스팅(casting)이란 작품의 배역에 맞는 배우를 배치하는 과정을 뜻합니다. 특히 장기 공연에서 캐스팅은 단순히 역할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같은 작품을 여러 번 볼 이유를 만들어주는 전략이기도 합니다. 《늘근도둑이야기》처럼 수십 년간 명배우들이 거쳐간 작품은 이 전략이 특히 뚜렷합니다. 故 박광정, 강신일, 문성근, 명계남, 유오성, 이성민, 박해준, 박원상 등 대한민국 연극과 영화를 대표하는 배우들이 이 무대를 거쳐갔습니다.
배우 선택 외에도 이 공연이 가진 롱런(long-run) 구조는 분석해볼 만합니다. 롱런이란 한 작품이 장기간 꾸준히 공연을 이어가는 방식을 뜻하는데, 대학로에서 수십 년간 롱런에 성공한 작품은 극히 드뭅니다.
아래는 이 공연이 롱런을 이어가는 데 기여한 요소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풍자가 작품의 기본 틀을 이루고 있습니다.
- 배우 캐스팅을 시즌마다 교체해 같은 작품을 여러 번 볼 이유를 만든다.
- 약 100분이라는 공연 시간과 12세 이상 관람 가능 등급으로 접근성을 높인다.
- 서울 대학로뿐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공연하며 관객층을 넓혀왔습니다.
- 배우들의 즉흥적인 애드리브가 매 회차의 경험을 다르게 만든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이 공연이 왜 35년 넘게 살아남았는지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입니다.
저는 아직도 박철민과 유일한 사이에서 결정을 못 하고 있습니다. 결국 직접 예매하는 순간까지 고민할 것 같습니다. 그냥 가을에 혜화역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가다가 그날의 캐스팅에 맡겨볼까 싶기도 합니다. 《늘근도둑이야기》는 그렇게 가볍게 만나도 좋을 공연처럼 느껴집니다. 모든 연극이 무거운 메시지를 전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무대에 오르기까지 배우와 제작진이 들인 시간과 노력만큼은 잊지 않고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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