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 "화이트 래빗 레드 래빗" : 배우,선택,줄거리
연극을 보러 가면서 배우가 오늘 대사를 제대로 알고 있을지 걱정해본 적은 없습니다. 이미 충분히 연습하고 무대에 오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화이트 래빗 레드 래빗》을 찾아보다가 이 당연한 전제가 깨졌습니다.
배우는 공연 전까지 대본을 읽지 않습니다. 리허설도 없고 무대에는 한 명의 배우만 올라갑니다. 그날 처음 받은 대본을 펼치는 순간부터 공연이 시작되는 독특한 방식입니다.
처음에는 솔직히 배우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는 연극인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작품의 구조를 조금 더 찾아보니 궁금한 대상이 배우에서 관객으로 바뀌었습니다.
나는 객석에 앉아서 어디까지 내 판단대로 움직일 수 있을까.
배우가 모르는 것을 관객도 함께 만난다
《화이트 래빗 레드 래빗》은 이란 출신 극작가 낫심 술레이만푸어가 쓴 작품입니다. 작가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이 작품을 리허설과 연출가, 세트가 없으며 매 공연 새로운 배우가 대본을 처음 접하는 형식으로 소개합니다. 2011년 초연 이후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여러 지역에서 공연됐습니다(출처: Nassim Soleimanpour 공식 홈페이지).
이 작품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즉흥성(Improvisation)입니다. 즉흥성이란 미리 정해진 연기만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생기는 상황과 자극에 반응하는 성질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배우가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대로 이야기를 만드는 즉흥극은 아닙니다. 작가가 쓴 대본이 있고 배우는 그 문장을 따라갑니다. 다른 점은 다음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배우 자신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 설정을 알고 나니 배우가 잠시 말을 멈추는 순간조차 다르게 보일 것 같습니다. 대본에 적힌 침묵인지, 정말 예상하지 못한 문장을 만난 것인지 객석에서는 쉽게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2026년 시즌에는 고영빈, 김히어라, 서현철, 소주연, 장동윤, 전소민 등을 포함한 24명의 배우가 참여합니다. 한 회차에 한 명의 배우만 무대에 서기 때문에 같은 대본이라도 그날 마주하는 반응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출처: 연합뉴스).
그런데 왜 관객의 선택이 중요할까
이 작품을 알아보면서 가장 궁금해진 부분은 따로 있었습니다. 무대 위 배우가 관객에게 무언가를 요청한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동조(Conformity)라는 개념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동조란 주변 사람이나 집단의 행동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판단이나 행동을 맞추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혼자 있을 때라면 하지 않을 행동도 여러 사람이 함께 움직이면 별다른 의심 없이 따라갈 때가 있습니다. 극장 역시 여러 사람이 같은 방향으로 무대를 바라보는 공간입니다. 옆 사람이 먼저 움직였을 때 나도 따라야 하는지, 그냥 앉아 있어도 되는지 순간적으로 고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이트 래빗 레드 래빗》의 관객 참여(Participatory Theatre)는 단순한 이벤트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집니다. 관객 참여형 연극은 객석에 앉아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행동이나 반응이 공연의 일부가 되는 형식을 뜻합니다.
예술의전당도 이 작품에서 관객을 공연을 함께 완성하는 동행자로 설명합니다(출처: 예술의전당).
저라면 이 지점을 유심히 보고 싶습니다. 배우가 무엇을 할지가 아니라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말입니다.
한 번 본 배우는 다시 할 수 없는 이유
또 하나 특이한 점은 배우에게 사실상 한 번뿐인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대본을 알고 나면 ‘처음 읽는다’는 조건을 다시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첫 문장을 읽을 때의 반응, 예상하지 못한 지시를 발견했을 때의 표정도 그대로 반복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특징은 공연예술의 일회성(Ephemerality)과도 연결됩니다. 공연예술의 일회성이란 같은 작품이라도 배우와 관객, 그날의 상황이 달라지면서 완전히 동일한 공연을 다시 만들어내기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캐스팅표를 볼 때도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가 연기를 가장 잘할까?’보다 ‘내가 알고 있던 배우는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까?’가 더 궁금합니다.
대사를 완벽하게 전달하는 모습이 아니라 잠깐 멈추고 생각하는 모습까지 공연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이 작품의 독특한 부분입니다.
줄거리를 미리 찾아보지 않기로 한 이유
처음에는 제목에 등장하는 흰 토끼와 붉은 토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검색하면 줄거리와 작품 해석을 미리 확인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멈췄습니다.
배우조차 대본의 다음 내용을 모르는 작품이라면 관객인 저도 어느 정도 모르는 상태로 들어가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메타시어터(Metatheatre)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연극이 자신이 연극이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고 배우, 대본, 관객과 같은 연극의 구조 자체를 작품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을 말합니다.
《화이트 래빗 레드 래빗》에서는 배우가 대본을 읽는 행위 자체가 무대 위에 드러납니다. 관객 역시 그 과정을 보고 반응합니다. 그래서 이야기의 내용뿐 아니라 ‘지금 이 공연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가’를 보는 것도 하나의 관람 포인트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줄거리 대신 질문 하나만 가지고 극장에 가보고 싶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행동을 요구하고 주변 사람들이 먼저 움직인다면, 나는 이유를 생각하고 움직일까. 아니면 자연스럽게 그들을 따라갈까.
《화이트 래빗 레드 래빗》이라는 제목의 의미보다 지금은 그 답이 더 궁금합니다.
참고 자료
예술의전당 《화이트 래빗 레드 래빗》 공연정보
https://www.sac.or.kr
Nassim Soleimanpour 공식 홈페이지
https://www.nassimsoleimanpour.com
연합뉴스 《화이트 래빗 레드 래빗》 관련 기사
https://www.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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